영화

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

함부르거 2023. 10. 28. 12:52

미야자키 하야오 영감님의 마지막 영화가 될 거 같은 작품을 보고 왔습니다. 어린 시절 영감님 영화를 보면서 자라고 성인이 되고 이젠 중년을 넘어 가고 있는 저 같은 팬한테는 여러 가지로 애잔한 감상이 드는 영화였네요.

 

이 영화는 영감님의 인생 그 자체예요.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은 그냥 제목만 빌려 온 거고 영감님이 자기 인생 이야기 하는 작품입니다. 그렇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모노노케히메 때랑 똑같습니다. "살아라." 그리고 거기에 한마디 더 붙이는 거죠. "난 이렇게 살았는데, 너희는 어떻게 살 거냐?"

 

먼저 경고하는데 이 영화는 매우 불친절합니다. 배경 설명이고 뭐고 없고, 타이틀부터 바로 본 이야기 시작이예요. 34년 넘게 영감님 팬이었던 저도 러닝타임 내내 무슨 이야기인지 헤매다가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 걸 보면서야 이해가 되는 그런 영화입니다. 근데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은 영감님이 제작비와 러닝타임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든 메시지를 꾸겨 넣다 보니 이렇게 된 거 아닌가 싶네요. "니들이 내 팬이라면 어떻게든 이해는 될 거야"라는 식으로 전개를 해 나갑니다. 대중성 따위 개무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놈들만 보라는 식으로 만들었어요. 덕분에 뭔 이야기인지도 모르게 까고 보는 무식한 언론도 있지만 절대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는 영화 아닙니다. 오히려 예술성만 놓고 보면 미야자키 사단의 마지막 걸작으로 봐도 되요.

 

미장센이니 연출이니 작화니 그런 건 보면 아는 거니까 생략할 게요. 영감님 마지막 영화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끝내줘요. 이제부터는 내용 이야기를 할 거니까 스포일러 싫은 분들은 나가시면  됩니다.

 

이 영화의 주인공 마히토는 누가 봐도 어린 미야자키 하야오입니다. 전쟁 중에 비행기 공장을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내미가 어디 또 있겠어요. 작중 등장하는 탑은 그가 쌓아 올린 환상의 세계입니다. 그 탑을 세운 큰 할아버지는 노년의 영감님이구요. 계모 나츠코는 어린 주인공에게는 대면하기 싫은 현실을 상징하는 존재이자, 성인이 되어 가는 그에게 숨겨진 깊숙한 욕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. 

 

그리고 그 욕망으로 가는 길을 이끄는 게 왜가리, 즉 스즈키 토시오의 페르소나죠. 왜가리는 처음엔 되게 사악하게 보입니다. 근데 알고 보면 그도 자기 욕심이 있을 뿐 나름 열심히 사는 녀석이구요. 도움도 많이 되죠. 딱 스즈키 토시오 그 자체입니다. 그렇게 보면  왜 그렇게 못 생기게 그렸는지도 이해가 됩니다.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즈키 토시오와 미야자키 감독의 관계를 알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.

 

온갖 고생을 해가며 소년은 결국 탑의 주인, 큰 할아버지, 즉 늙은 미야자키이자 거대한 환상의 세계의 창조자와 마주하게 됩니다. 그리고 그 거인은 장난감 탑을 쌓아 놓고 이거 무너지면 세계가 무너진다며 전전긍긍, 후계자를 찾고 있습니다. 하지만 소년은 그걸 물려 받길 거부하고 당당하게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. 다만 한 조각 돌맹이를 손에 들고서요. 

 

이 영화에선 모든 것들이 지저분하고 축축하고 더럽습니다. 주인공은 진흙탕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고 물에 빠지고 새똥을 뒤집어 써야 하죠. 만나는 인간(짐승?)들은 욕망에 가득 차서 날 잡아 먹을 생각이나 하구요. 그런데 다 지나고 보면 걔들도 이해가 되고  알고 보면 나도 그닥 다를 거 없어요. 천국 같은 곳이 있나 했더니 위태롭게 쌓아 올린 장난감 탑 하나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였습니다. 헌데 또 무너져 버려도 남는 게 없지는 않아요. 고작 돌맹이 하나 뿐이지만요. 

 

모험이 끝나고 주인공 손에 남은 건 돌맹이 하나 뿐입니다. 그리고 왜가리가 말하죠. "그거 특별한 건데~ 뭐 별 거 아니긴 하지만" 이 돌맹이는 탑의 상징입니다. 어릴 적엔 불꽃과 함께 날아온 거대한 탑 같은 영감, 재능으로 느껴졌는데, 이제 와서 보니 고작 돌맹이 하나였다. 난 그걸 바탕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.

 

이 영화는 제가 느끼기엔 이렇습니다. 어릴 적 마음 속 불꽃을 바탕으로 일생 분투해서 거대한 환상의 세계를 세운 거인 미야자키가 말년이 되어 보니  '그거 별 거 없네. 곧 사람들한테 잊혀지겠네.'란 걸 깨달은 겁니다. 후계자 찾느라 고생했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 필요 없었던 거구요.

 

하지만 그게 뭐 아쉽고 억울하냐면 그건 아니구요. '난 인생 이렇게 재밌게 살았다. 더럽고 힘든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도 좀 봤다. 그것도 곧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니들 마음 속에 한조각 돌맹이라도 남는다면 그걸로 만족이다. 다만 너희들이 인생 더럽고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. 살아라.' 

 

뭐 모노노케히메 시절부터 영감님이 항상 하던 이야기입니다. 아무리 힘들고 더럽고 괴로워도 살아야 한다는 거.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다운 걸 찾으라는 이야기죠.

 

이 영화 보고선 이젠 영감님이 다 내려 놓으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프기도 합니다. 영화가 걸작이 되든 말든 돈을 벌든 말든 이젠 영감님한테는 다 상관 없는 이야기가 된 거 같아요. 대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충분히 하신 거 같구요.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에 애정이 남아 있는 분이라면 한번씩들 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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